파도의 높이 Wave Height

이고은 개인전

2024. 11. 22. Fri ~ 12. 3. Tue
아트 포 랩, 초점과 온점





    기억은 뿌리를 내리고 흩어지며,
  
        흩어진 것들은 자라 흘수선의 높이가 된다.

'아트 포 랩'과 '초점과 온점' 두 공간을 잇는 전시 《파도의 높이》는, 일상적 장면과 오래된 기억들을 기록한 종이 위에서 자라났다. 평면과 곡면, 그림과 글, 희미한 풍경과 가까운 사물들 사이를 오가는 종이 씨앗 같은 작업은 각각의 지지체 위에 안착해 자라나, 흘수선의 여러 높이를 연결짓는다.

《파도의 높이》의 두 공간은 텍스트와 그림, 평면과 곡면의 이미지들이 서로를 비추며 단서가 되고, 관람자는 그 움직임을 자신의 기억으로 옮겨와 걸음을 이어간다.



아트 포 랩 전시 전경. 전시의 주제 글이 전시장 전면에 놓여있다.
초점과 온점 전시 전경. 전시에서 공개한 책자 세 권과 목조각 그림이 있다.

‘물거품이 영원을 은유하는 방법으로’


                                                   잎을 말리고
                                            이듬해에 다시 잎을
                                              움튼 그 모든 높이
  
은사초의 높이는
작은 본잎이 돋아나고 잎이 생장하고 지상부의
                    심장이 오르내리는 높이는 그 모든 높이
       파도의 높이는 그 모든 높이
  


이고은

우연히 떠오르는 장면이 꼭 그 사람의 지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흘수선1을 보았습니다. '잠겨있던 흘수선만 보았어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기사 글을 읽고 오랫동안 멈춰있었습니다.2 기준이 모두 흩어지는 시기에 식물을 가까이하며 그들의 호흡을 기록했습니다. 식물에 기댄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형태 없는 움직임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억이, 마치 길이 없어 보이는 맹지에서 흙 그림을 그려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생명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기억과 식물을 기록하다 흘수선의 눈금을 다시 보았습니다. 흘수선은 마치 기억의 일부처럼 빛이 바랬고 장소를 이동한 채 그 모든 높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파도의 높이》전시는 저와 가까워서 가장 주관적이고 가장 힘없어 보이는 제 속엣말들과 기억의 이야기들을 바라봅니다. 기억의 조각들은 작품 <트램 위에서의 시간>(2023)처럼 여러 겹 아래의 깊은 데 잠겨있기도 하고 <처음 그린 아그리파에서 마주친 아버지의 얼굴>(2024)처럼 파도 표면에 드러나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뭉쳤다가 와해되는 것을 반복하는 파도의 표면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느린 시간의 흐름에 기대어, 가깝고도 먼, 선명하게 혼재하는 다층적인 시간의 화면을 만들어갑니다.

전시의 경로는 '아트 포 랩'에서 '초점과 온점'으로 이어집니다. '아트 포 랩'에서는 기억이라는 파도를 수평 방향에서 바라보듯이 평면과 곡면의 그림으로 공간을 구성했으며 '초점과 온점'에서는 파도의 층위를 수직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간과 물성의 차이를 가진 평면과 곡면의 그림 세 점과 나무조각 하나와 세 갈래의 글 조각 모음을 함께 두었습니다. 교차하거나 비껴 포개져 있는 그림 속 기억의 화면은 여러 겹을 통과한 것일수록 보는 이의 시선에 반응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합니다. 곡면 구조물 위에 배접된 다층적인 이미지의 그림은 평면 그림에서 나타나는 시각적인 불연속성을 한 번 더 강조시키고, 보는 각도마다 형태를 달리해 한 번에 눈에 포착되지 않기에 어느 틈엔가 보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있게 합니다.

저의 작업은 오래된 속임수를 닮았습니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2023)의 안나가 언니를 위해 훼손된 글자들을 채워 읽던 양피지 책 속 이야기처럼 상실은 불가역적으로 찾아오지만, 원형을 닮으려는 어떤 존재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3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그리는 일, 잊어버리기 아쉬운 장면을 그리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일은 살이 붙고 변주되어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전시 《파도의 높이》는 제가 기록한 장면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저와 이야기를 만나게 될 미지의 당신을 위해 만들어낸 장면들입니다. 제가 지어낸 기억의 조각들이 당신의 기억과 만나 저마다의 파도로 이어지길 바라며 저의 《파도의 높이》의 물결을 전합니다. 물거품이 영원을 은유하는 방법으로,



  1. 선박과 물의 경계선을 따라서 선체가 잠기는 한계선을 말한다.
  2. 반종빈, “평형수 4분의 1만 채워... ‘과적 숨기려’”, 연합뉴스, 2014. 5. 5.
  3. 앤서니 도어 작가의 소설 『클라우드 쿠쿠 랜드」(2023)는 다섯 인물이 700여 년의 시간을 오가며 실존했던 고대 그리스의 작가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쓴 가상의 작품을 중심으로 펼쳐 보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트 포 랩 전시 전경. 전시의 주제 글이 전시장 전면에 놓여있다. '에트르타의 비구름'과 '도라지와 나비'가 공간의 문을 사이로 동시에 연결되어 보이고, 오른편에는 다시 식물로 연결되는 '쇠채아재비'와 '보리지'가 연결되는 형태로 바로 옆에 걸려있다. 기둥과 벽에 곡면으로 설치한 가로로 긴 형태의 노르망디 시절 풍경 작업과 매일 물주기한 식물들을 겹쳐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아트포랩 안쪽 공간 벽 전면에 한지 그림을 배접해 착 달라붙게 설치한 '호박이 데려다 준 곳'과 화판 위의 '트램에서 위에서의 시간'. 각각 시골 할머니 집과 전시장을 오가며 보았던 범계역 주변의 풍경들과 노르망디의 트램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겹쳐 기록되어있다. 전자는 떠오른 기억들을 비껴 그려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사물들이 드러나있으며, 후자는 겹쳐서 포개어져 있어 깊이 잠겨있는 기억처럼 희미하게 동시에 보인다 초점과 온점 전시 전경. 전시에서 공개한 책자 세 권과 목조각 그림이 있다. 작은 나무 조각 안에 투각으로 파들어가 형태를 만든 '슈니'와 처음 시도해본 곡면 목조각판에 창밖 풍경을 그린 한지 그림 '창문의 날씨'를 배접해 걸었다. '슈니' 목조각과 이어지는 '슈니보리'그림과 '고양이를 보았어' 벤치가 놓여있는 '초점과 온점' 전시전경 '동물', '식물', '기억'에 관한 짧은 글들을 엮은 책자 세 권을 파도의 표면처럼 조각해 만든 벽 선반에 전시했다.



가까이 갈수록 다가오는 멈4


박하은



기억은 흔적을 남기되, 그 선명함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어떤 것은 잔잔히 스며들고, 또 어떤 것은 거칠게 밀려와 흔적을 남긴다.
        멀리서 다가오는 순간에는 보이지 않던 물결이 어느덧 발끝을 적시고,

    마침내 지나간 자리엔 흩어진 거품만 남는다.


이고은(b.1991) 작가의 첫 개인전 《파도의 높이》는 기억이 흐르는 모양과 그것이 남긴 흔적의 단면들을 건져 올리며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되살려보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아트 포 랩과 초점과 온점이라는 두 공간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각자의 출발지로부터 어느 한 공간으로 그리고 다시 또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도록 유도한다.

전시가 진행되는 두 장소는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 작가의 기억과 관객의 경험이 교차하며 서로 다른 이야기가 쌓이는 여정의 일부다. 이고은은 전시를 통해 기억이라는 파도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잃어버렸던 순간들과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한편 전시의 경로에 초대된 산책자들은 전시를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자신이 목격하는 눈 앞의 장면들과 마음속에 고여 있던 순간들이 물결처럼 엇갈리는 순간을 마주하는 기억의 항해자로 거듭난다.


기억의 생장

기억이란 관찰자에 따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바뀌는 존재다. 작가에게 기억의 왜곡과 변주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기억이 가진 생명력의 증거로 여겨진다. 멀리서 보면 단일한 풍경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속에 무수한 층위가 숨어 있는 기억이 지닌 유동적이고도 모순적인 속성을, 작가는 파도에 빗대어 끊임없이 이어지고 쌓이는 물질과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고은의 작업에서 주요한 매개물로 등장하는 식물은 기억의 순환과 사그라짐을 자연의 생장과 연결짓는 요소이다. 식물이 자라고 시드는 과정에서 뜻을 찾으려 하지 않듯 기억 또한 목적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명체처럼 작동한다. 작가는 이러한 생명체적 기억의 속성을 탐구하며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퀼트 혹은 조각보의 형식을 차용한다. 겹쳐진 종이와 한지, 그리고 색을 쌓아 올리는 그의 작업 방식은 시간의 층위를 은유한다.

특히, 흘수선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배의 균형을 맞추는 선이면서도, 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이 선은 기억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그는 식물을 기록하며 변화하는 기억의 일관성을 찾으려 하고, 흘수선처럼 보이지만 고정되지 않는 유동성을 탐구한다. 이는 그의 작품 속에서 “선명함과 흐릿함”이라는 양극적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기억의 시각적 경로

이고은의 작업은 회화적 언어와 설치적 감각을 아우른다. 또한, 이번 전시의 병렬적인 공간의 연출은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는 파도처럼 곡선적이고 다층적인 공간을 구성하며 “조금 위에 있는 풍경과 조금 깊이 있는 풍경”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아트 포 랩’에서 주로 선보이는 이고은의 회화는 한지와 호분, 동양화 물감 등 전통적 재료를 사용하 면서도 물성과 기억의 변화를 탐구하는 현대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그는 한지와 동양화 재료를 통해 작품에 유연한 질감을 부여하면서, 개인적 기록으로서의 회화를 탐구한다. 종이에 겹겹이 쌓이는 색과 텍스처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축적을 상징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캔버스 대신 한지를 선택한 이 유를 “착 달라붙는 감각”으로 설명한다. 이는 기억이 물리적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마음속에 뚜렷이 남아있게 되는 감각적 경험과도 닿아 있다. 그의 작품 속 곡선과 휘어진 평면은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변주를 은유한다. 이는 마치 물결이 바람과 빛에 따라 색과 형태를 달리하듯, 명확한 선명함과 흐릿함 사이를 오가는 기억의 속성을 담아낸다. 노르망디의 풍경, 가족과의 유년 시절, 식물과 반려동물에 얽힌 사소하지만 강렬한 기억들은 작품 속에서 한 번 더 가공되어 새로운 생명체로 자리 잡는다.

‘초점과 온점’에서는 회화 두 점과 이고은이 직접 목공으로 제작한 벤치와 선반, 그리고 그 위에 올려 진 에세이 zine 세 권이 놓여 있다. 이 공간은 충실히 경로를 따라 걸어온 관객이 작가의 내면으로 좀 더 깊숙이 침잠할 수 있는 쉼표로 기능한다. 파도의 물결을 형상화한 선반 위의 에세이들은 각각 동물, 식물, 기억을 다루는 작가의 자유시와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관객은 작가의 내면적 기억의 리듬을 시각화한 문장의 형태를 들여다보며, 문학으로 번역된 기억의 형태를 만나게 된다.


파도의 높이 그리고, 끝없는 질문

결국,《파도의 높이》는 기억과 상실, 그리고 기록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전시다. 작가는 기억을 단순히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고은의 작업은 우리의 기억과 감각을 끊임없이 흔들며, 사라짐 속에서도 남아있는 무언가의 힘을 일깨운다. 《파도의 높이》는 기억이라는 파도가 어떻게 우리를 덮쳤다가 물러가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장면들을 붙잡아 다시 떠올리는지 묻는다. 이고은은 자신의 작업을 살아있는 보관함 으로 비유하며, 회화가 지닌 즉각적이고 주관적인 힘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관객이 뿌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만든다. 이는 단순히 기록된 기억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관객이 자신의 기억 속 장면들을 다시 직면하도록 유도한다.


   그가 쌓아 올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닷물에 실수로 떨어트린 물건을 찾듯이 
                                 뿌연 기억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실마리 한움큼을 
                          찾아보고 싶은 의지가 싹튼다.  
                    밀려왔다가 다시 쓸려가는 잔잔한 물결 속에서 
                                 분명하게 보였다가도 이내 사라지는 조개껍데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1.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색채 속을 걷는 사람』, 이나라 (역), 서울 : 현실문화연구, 2020, p. 24.


《파도의 높이》 전시 포스터. 디자인 : 경체리

기획 및 서문 : 이고은

전시 평문 : 박하은

디자인 : 경체리

사진 : 고정균, 구의진

설치 도움 : 신이수

후원 : 경기문화재단





*스케치업으로 보는 ≪파도의 높이≫ 아트 포 랩 전시 공간


*범계역 ~ 아트 포 랩 ~ 초점과 온점까지의 경로 (37.3930° N, 126.9535° E)


* ☀️ ☀️ ☀️ 🌧️ ❄️ ❄️ 🌨️ 🌧️ 🌧️ ☀️ 🌤️ 전시 기간과 포개졌던 날씨 (세부 내용을 보고 싶으시다면 마우스 커서를 날씨 이모티콘 위에 놓아보세요.)